


목차
1. 돈의 신뢰 구조와 결제 인프라의 간극
2.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이 해법이 될 수 있을까?
3. 프로젝트 한강: 디지털 원화 인프라의 실험장
4. 프로젝트 한강은 어디까지 연결될 수 있는가
5. 결론
한강은 예로부터 한반도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물길이었다. 이 물길은 전국 각지로 뻗어나가 사람과 물자를 서로 이어주고, 그 주변에는 상업과 행정이 모여들었다. 한강 주변의 인프라나 그 위를 오가던 배의 모습은 예전과 사뭇 달라졌지만, 한강의 역할은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디지털 경제에도 이런 거대한 물길이 필요하다. 돈과 자산이 국경과 플랫폼을 넘어 이동하고, 사람과 시장을 연결하며, 그 주변에 금융 활동과 기관들이 모여들 수 있는 인프라 말이다. 스테이블코인은 바로 그런 인프라인 것처럼 등장했다. 부산에 있든 뉴욕에 있든 은행 영업시간과 무관하게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을 보낼 수 있고, 블록체인 위에서 다른 금융 서비스와 곧바로 연결할 수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한국은 민간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곧바로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기관용 CBDC와 예금 토큰을 결합한 구조인 프로젝트 한강을 먼저 실험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프로젝트 한강 1차 실거래 파일럿을 마친 뒤 2026년 3월 2단계 추진을 발표했으며, BIS 재직 시절부터 기관용 CBDC와 예금 토큰을 결합한 디지털 통화 인프라를 연구해온 신현송 총재가 2026년 4월 21일 취임하면서 이 방향은 앞으로도 중요한 정책 축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언뜻 보면 이는 스테이블코인의 시대에 다소 느리거나, 지나치게 제도권 중심적인 접근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접근이 정말 뒤처진 방식인지, 아니면 디지털 통화 인프라가 풀어야 할 더 근본적인 문제를 겨냥한 것인지는 따져볼 필요가 있다. 왜 한국을 비롯한 여러 국가들은 민간 스테이블코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보고 중앙은행 화폐와 상업은행 예금을 토큰화하는 방향을 실험하고 있을까? 이 글에서는 프로젝트 한강이 해결하려는 문제가 무엇인지, 그럼에도 경계해야 할 디테일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안에서 민간 기업의 기회는 어디에 생길 수 있는지 살펴본다.
1. 돈의 신뢰 구조와 결제 인프라의 간극
1-1. 현금은 줄고, 디지털 결제는 일상이 됐다
지난 10년간 한국의 결제 생태계는 서서히, 그러나 근본적으로 변했다. 한국은행 지급수단 이용행태 조사에 따르면 전체 결제 건수에서 현금이 차지하는 비중은 2013년 41.3%에서 2024년 15.9%로 11년 사이에 절반 넘게 떨어졌으며, 모바일 기기를 통한 결제는 카드 결제 전체의 절반을 넘어서며 일상의 중심이 됐다.
사람들은 이미 카카오페이, 네이버페이, 토스 같은 간편결제 서비스로 밥을 사고, 교통비를 내고, 온라인 쇼핑을 한다. 이용자 입장에서는 결제가 거의 실시간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스마트폰 화면에서 금액을 확인하고 인증을 마치면 결제 완료 알림이 뜨고, 가맹점도 곧바로 거래가 성사된 것으로 인식한다.
그러나 사용자의 경험이 디지털화되었다고 해서 결제를 완결시키는 금융 인프라까지 같은 방식으로 바뀐 것은 아니다. 화면 위의 결제는 즉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에서는 여러 금융기관의 장부와 결제 시스템이 서로 맞물려 거래를 정리한다.
따라서 지금의 문제는 단순히 “돈이 디지털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이미 사람들은 디지털 방식으로 돈을 쓰고 있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 디지털화된 돈이 어떤 신뢰 구조 안에서 발행되고, 어떤 결제 인프라를 통해 최종적으로 이동하며, 그 과정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연결되어 있는가다.
1-2. 2계층 통화 시스템 — 돈의 신뢰 구조
돈의 신뢰 구조를 이해하려면 먼저 우리가 일상에서 쓰는 돈과 은행 간 최종 정산에 쓰이는 돈을 구분해야 한다. 우리가 계좌이체나 간편결제로 사용하는 돈은 대부분 한국은행이 직접 발행한 현금이 아니라, 시중은행 장부에 기록된 예금이다. 반면 은행들끼리 최종적으로 자금을 정산할 때는 중앙은행 화폐가 사용된다. 각 은행은 한국은행에 당좌예금계좌를 보유하고 있으며, A은행에서 B은행으로 자금이 이동할 때 은행 간 최종 정산은 이 계좌 간 자금이체를 통해 이루어진다. 이때 한국은행 당좌예금계좌에 예치된 결제자산을 ‘지급준비금’ 또는 ‘준비금’이라고 부른다.
이처럼 중앙은행은 금융기관 간 최종 결제에 쓰이는 돈을 공급하고, 시중은행은 일반 가계와 기업에게 예금이라는 형태의 돈을 제공한다. 이를 2계층 통화 시스템이라고 부른다. 이 구조 덕분에 국민은행 예금 1만 원과 신한은행 예금 1만 원은 같은 원화로 받아들여지고, 은행 간 자금 이동은 중앙은행 결제 시스템을 통해 최종적으로 정리된다.

2계층 통화 시스템에서 중앙은행(1계층)의 핵심 역할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은행 간 지급을 최종 정산하는 결제자산을 제공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위기 시 금융 시스템에 유동성을 공급하는 최후의 공급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반면 시중은행(2계층)의 역할은 준비금을 기반으로 기업과 개인에게 예금·대출을 제공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은행은 실제 보유한 준비금보다 훨씬 많은 예금을 창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부분지급준비제도). 한국의 요구불예금에는 지급준비율 7%가 적용되는데, 이는 예금의 7%만 한국은행 지급준비금으로 보유하면 된다는 뜻이다. 나머지 93%는 은행이 대출 등으로 운용할 수 있다. 이를 신용창조라고 하며 뒤에서 다룰 탄력성의 원천이 된다.
1-3. 지급결제 시스템 — 신뢰 구조를 작동시키는 운영 인프라
2계층 통화 시스템이 “누가 어떤 돈을 발행하고, 그 돈의 신뢰가 어떻게 유지되는가”에 관한 구조라면, 지급결제 시스템은 “그 돈을 실제 거래에서 어떻게 지급하고, 청산하고, 최종 결제하는가”에 관한 운영 인프라다.
현행 지급결제 시스템은 한은금융망을 중심으로 소액결제, 외환결제, 증권결제 시스템이 연계되는 구조다. 각 시스템은 지급지시, 청산, 자산이전을 별도로 처리하지만, 금융기관 간 최종 결제는 결국 한은금융망 같은 각국 중앙은행의 거액결제시스템을 통해 완결된다. 이 구조는 중앙은행 화폐를 통한 결제 안전성을 제공하지만, 동시에 여러 시스템이 사후적으로 동기화되어야 한다는 비효율을 남긴다.

1) 배치 정산의 미결제 리스크
일반 소매 결제에서는 이용자 화면에 결제가 거의 즉시 완료된 것처럼 표시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은행 간 최종 정산은 별도 시점에 이뤄진다. 한국의 소액결제시스템은 개별 거래가 발생할 때마다 은행 간 준비금이 즉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일정 기간 동안 누적된 지급지시를 바탕으로 은행별 순채권·순채무를 계산한 뒤 그 차액을 한은금융망에서 최종 결제한다.
이 방식은 개별 거래를 모두 즉시 결제하는 것보다 유동성 사용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용자에게 결제가 완료된 것처럼 보이는 시점과 은행 간 중앙은행 화폐가 실제로 이동하는 시점 사이에는 시간차가 존재한다. 이 사이에 특정 참가은행이 최종 정산 의무를 이행하지 못하면, 이미 이용자에게 완료된 것으로 처리된 결제와 은행 간 실제 자금 정산 사이에 불일치가 발생할 수 있다. 개별 거래 규모는 작더라도 소액결제는 건수가 매우 많기 때문에, 차액결제 구조는 효율성과 함께 이러한 미결제 리스크를 내재한다.
2) 국제 결제의 순차적 분리
국제 결제에서는 이러한 분리와 순차성이 더 크게 나타난다. 한국 기업이 미국 거래처에 달러를 송금하는 경우, 지급 메시지는 은행 간 네트워크를 통해 전달되고, 실제 자금 이동은 환거래 은행, 현지 결제 시스템, 각국의 운영시간과 규제 절차를 거쳐 처리된다. 각 단계는 서로 다른 기관, 원장, 시간대, 컴플라이언스 체계에 의존하기 때문에 지연과 오류, 비용, 상태 불확실성이 누적된다.
FSB와 BIS가 국경 간 결제의 대표적 문제로 높은 비용, 느린 속도, 낮은 투명성, 제한적 접근성을 지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각국 결제 시스템의 운영시간이 겹치지 않으면 결제 지연이 발생하고, 그만큼 유동성 비용과 미결제 리스크가 커질 수 있다. 이는 사람 간 송금에서는 불편함으로 끝날 수 있지만, 에이전트 기반 결제나 자동화된 기업 간 워크플로에서는 더 큰 문제가 된다. 결제 완료 여부가 다음 행동의 조건이 되는 구조에서는 결제 상태의 불확실성 자체가 전체 프로세스를 멈추게 하는 병목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3) 증권 원장과 대금 원장의 분리
증권 거래에서도 유사한 문제가 존재한다. 증권의 소유권은 예탁결제원의 증권결제시스템에서 관리되고, 대금은 은행 계좌 또는 중앙은행 결제 시스템을 통해 이동한다. 현행 인프라는 이 두 흐름을 연결하기 위해 DvP, 즉 증권 인도와 대금 지급을 연계하는 동시결제 구조를 사용한다. 이는 한쪽만 이행되는 원금 리스크를 줄이기 위한 핵심 장치다.
다만 DvP가 존재한다고 해서 모든 결제 마찰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현행 DvP는 증권과 대금이 하나의 원장 위에서 직접 교환되는 방식이 아니라, 예탁결제기관의 증권결제 시스템과 중앙은행 또는 상업은행의 대금결제 시스템을 결제일에 조건부로 연동하는 구조다. 따라서 거래 체결 시점과 최종 결제 시점 사이에는 여전히 시간이 존재하며, 이 기간 동안 시장 리스크, 유동성 부담, 운영 리스크가 남는다.
2. 그렇다면 스테이블코인이 해법이 될 수 있을까?
2-1. 스테이블코인은 디지털 화폐 수요를 증명했다
이 공백을 민간이 먼저 채우려 했다. USDT, USDC 같은 달러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2020년대 들어 빠르게 성장했고, 암호자산 거래뿐 아니라 송금과 결제 영역으로도 쓰임새를 넓혔다. 특히 달러 접근성이 낮은 신흥국에서는 스테이블코인이 실물 달러의 디지털 대체재처럼 쓰이고 있으며, 거래소, 지갑, DeFi, 결제 서비스는 스테이블코인을 중심으로 빠르게 연결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의 장점은 명확하다. 은행 영업시간과 무관하게 이동할 수 있고, 퍼블릭 블록체인 위에서 누구나 접근 가능한 결제 자산으로 기능하며, 스마트 계약과 결합해 자동화된 결제와 금융 서비스를 구현할 수 있다. 기존 금융권의 느린 국제 송금, 분리된 결제망, 폐쇄적인 계정 구조와 비교하면 스테이블코인은 인터넷의 속도와 개방성을 닮은 화폐처럼 보인다.
이는 시장이 어떤 형태의 돈을 원하는지 보여주는 신호다. 시장은 24시간 이동 가능하고, 국경을 넘기 쉬우며, 다른 디지털 서비스와 바로 결합될 수 있는 화폐를 원하고 있다.
2-2. 스테이블코인이 넘지 못한 세 가지 기준
그러나 국제결제은행 BIS는 2025 연차보고서에서 스테이블코인이 통화 시스템의 중심이 되기에는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그 세 가지는 단일성, 탄력성, 무결성이다.

1) 단일성(Singleness)
단일성이란 누가 발행한 돈이든 같은 단위의 화폐가 1대1로 교환된다는 사회적 약속이다. 국민은행 예금 1만 원과 신한은행 예금 1만 원이 같은 가치로 받아들여지는 이유는 두 은행의 신용도가 완전히 같아서가 아니라, 은행 간 최종 정산이 한국은행의 중앙은행 화폐, 즉 지급준비금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중앙은행 화폐가 상업은행 예금의 공통 결제 앵커로 기능하면서 서로 다른 은행 예금의 가치를 하나로 묶어주는 것이다.
스테이블코인은 이 지점에서 취약하다. 같은 “1달러 스테이블코인”이라도 발행사, 규제 환경, 준비자산 구성, 공시 방식, 상환 구조가 다르기 때문이다. USDT와 USDC는 모두 1달러를 목표로 하지만, 시장은 두 토큰을 완전히 동일한 신용위험으로 보지 않는다. 즉 스테이블코인의 가치는 단순히 “1달러로 교환된다”는 약속만이 아니라, 발행사가 실제로 준비자산을 안전하게 보유하고 필요할 때 상환할 수 있다는 신뢰에 의해 유지된다.
대표적인 사례가 2023년 3월 USDC 디페깅이다. 실리콘밸리은행 파산 당시 Circle이 USDC 준비금 중 33억 달러를 해당 은행에 예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USDC는 한때 약 0.87달러까지 하락했다. 이는 스테이블코인도 발행사와 준비자산에 대한 신뢰가 흔들릴 경우 동일한 “1달러 토큰” 사이에서도 가격 차이가 발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2) 탄력성(Elasticity)
탄력성이란 경제가 필요로 할 때 화폐와 신용 공급이 신축적으로 늘어날 수 있는 능력을 뜻한다. 전통적 은행 시스템에서는 중앙은행이 최후의 유동성 공급자 역할을 하고, 은행은 예금과 지급준비금을 기반으로 기업과 가계에 대출을 제공한다. 특히 위기 국면에서 중앙은행의 유동성 공급, 지급결제 안정화 조치, 감독당국의 대응은 신용 수축이 실물경제로 급격히 번지는 것을 완화하는 완충 장치로 작동한다.
스테이블코인 생태계에도 Aave, Compound 같은 DeFi 대출 프로토콜을 통한 신용 창조는 존재한다. 예를 들어 사용자가 USDC를 담보로 예치하고 DAI나 USDT를 차입한 뒤, 이를 다시 다른 프로토콜에 예치해 추가 유동성을 확보하는 식이다. 즉 스테이블코인 위에서도 담보 기반의 신용 승수 효과는 만들어질 수 있다.
문제는 이 신용이 경제가 가장 필요로 하는 순간에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는 점이다. DeFi 신용은 대부분 담보 자산의 시장가격과 자동 청산 규칙에 강하게 묶여 있다. 호황기에는 담보 가치가 오르고 차입 한도가 늘어나면서 레버리지가 확대된다. 반대로 가격이 하락하면 담보 가치가 줄어들고, 차입 한도가 축소되며, 청산 물량이 다시 가격 하락을 압박한다. 이 구조는 신용을 경기역행적으로 공급하기보다 시장 가격에 따라 경기순응적으로 확대·축소시키는 경향이 강하다.
이러한 경기 순응성은 전통 금융에도 존재하지만 결정적 차이는 ‘최후의 유동성 공급자’(lender of last resort)의 존재 여부다. 은행 시스템에서는 위기 시 중앙은행이 유동성을 공급해 지급결제망과 신용 흐름의 급격한 경색을 완화할 수 있다. 반면 DeFi에는 이 역할을 수행하는 공적 주체가 없다. 스마트 계약은 담보 가격이 임계치 아래로 떨어지면 사전에 정해진 규칙에 따라 청산을 실행할 뿐이며, 경제 전체의 유동성 상황을 고려해 신용 공급을 유지하거나 확장하지 않는다. 따라서 현재의 스테이블코인·DeFi 기반 신용 구조는 평시에는 효율적인 유동성 공급 수단처럼 보일 수 있지만, 위기 시에는 오히려 신용 수축을 증폭시킬 수 있다는 한계를 가진다.
3) 무결성(Integrity)
무결성이란 화폐 시스템이 자금세탁, 테러자금조달, 제재 회피 같은 불법 사용을 통제하면서도 그 통제 권한이 명확한 법적 절차와 책임 구조 안에서 행사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전통 금융 시스템에서는 고객확인, 의심거래보고, 제재 리스트 점검, 법원 명령에 따른 동결·몰수 절차가 작동한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누가 어떤 근거로 자금 이동을 제한할 수 있는지에 대한 책임 주체와 절차가 비교적 명확하다.
퍼블릭 블록체인 기반 스테이블코인은 이 지점에서 구조적 딜레마를 갖는다. 한편으로는 비수탁 지갑과 익명 주소를 통해 KYC 없이 접근할 수 있어 불법 자금 유입을 사전에 차단하기 어렵다. 다른 한편으로는 USDC, USDT 같은 중앙화 스테이블코인의 경우 발행사가 특정 주소를 동결할 수 있는 기술적 권한을 갖는다. 즉 접근 통제가 약하면 범죄 자금이 들어오기 쉽고, 동결 권한을 민간 발행사에 넓게 맡기면 자산 통제의 기준과 절차가 불투명해질 수 있다.
2026년 4월 Drift Protocol 해킹 사태는 이 딜레마를 잘 보여준다. 당시 공격자는 탈취 자산 중 약 2.32억 달러 규모의 USDC를 Circle의 CCTP를 통해 솔라나에서 이더리움으로 이동시켰고, 온체인 데이터 분석가인 ZachXBT는 이 과정이 미국 업무 시간 중 약 6시간에 걸쳐 100건 이상의 트랜잭션으로 진행됐음에도 Circle이 동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Circle은 제재, 법집행기관 요청, 법원 명령 등 법적 근거가 있을 때만 동결한다는 입장을 제시했지만, 바로 며칠 전 Circle이 16개 지갑이 공식 설명 없이 동결됐다는 보도가 나와 논란이 된 바 있다. 이는 민간 발행사가 기술적으로는 강력한 통제 권한을 갖고 있지만, 그 권한 행사의 일관성과 책임 구조는 여전히 논쟁적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2-3. 2계층 통화 시스템은 왜 여전히 필요한가
이처럼 스테이블코인이 넘어서야 하는 장벽은 단순한 기술 문제가 아니다. 스테이블코인이 빠르고 프로그래밍 가능하다는 장점은 분명하지만, 통화 시스템은 단순히 거래를 빠르게 처리하는 것만으로 성립하지 않는다. 서로 다른 발행자의 돈이 같은 단위로 받아들여지고, 위기 시 신용과 유동성이 급격히 수축하지 않으며, 불법 사용을 통제할 수 있는 책임 구조가 필요하다.
2계층 통화 시스템은 중앙은행 화폐와 상업은행 예금이 결합된 구조를 통해 단일성, 탄력성, 무결성을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해 왔다. 중앙은행 준비금은 은행 간 최종 결제자산으로 기능하며 상업은행 예금의 가치를 하나로 묶어주고, 중앙은행과 상업은행은 결제 유동성과 신용을 공급하며, 은행의 규제 및 감독 체계는 금융 시스템의 무결성을 보완해왔다.
따라서 기존 2계층 통화 시스템을 폐기하는 것은 현실적인 해법이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돈의 신뢰 구조는 2계층 통화 시스템에서 가져오되, 그 구조를 작동시키는 운영 인프라를 디지털 환경에 맞게 다시 구현하는 것이다.
이 같은 문제의식은 한국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 BIS와 주요 중앙은행들이 추진하는 프로젝트 아고라 역시 토큰화된 상업은행 예금과 기관용 중앙은행 화폐를 결합해 기존 2계층 통화 시스템을 유지하면서 국경 간 결제 인프라를 개선할 수 있는지를 탐색하고 있으며, 한국은 프로젝트 한강을 통해 이 질문에 답하고 있다.
3. 프로젝트 한강: 디지털 원화 인프라의 실험장
프로젝트 한강은 BIS가 제시한 통합원장(unified ledger) 개념을 한국은행이 실제로 구현하고, 현행 2계층 통화 시스템 하에서 세 가지 요건을 충족하기 위해 추진한 디지털화폐 테스트 프로젝트다.
3-1. 통합원장이란
BIS가 제시한 통합원장은 토큰화된 화폐와 토큰화된 자산이 하나의 프로그래밍 가능한 공통 플랫폼, 또는 상호운용성이 높은 플랫폼 위에서 발행·이전·결제되는 차세대 금융시장 인프라를 뜻한다. 여기서 토큰화된 자산은 주식, 채권, 탄소배출권, 디지털 상품권 등 다양한 형태를 포함할 수 있다.
이 구상이 겨냥하는 지점은 기존 금융거래에서 분리되어 있던 지급지시, 청산, 자산이전을 하나의 연속적인 작업으로 통합하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토큰화된 화폐와 토큰화된 자산을 같은 실행 환경 또는 긴밀히 연결된 플랫폼에 올려, 자산 이전과 대금 지급을 하나의 원자적 거래로 처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3-2. 기관용 CBDC와 예금 토큰
프로젝트 한강에서 중앙은행 화폐는 기관용 CBDC로, 상업은행 예금은 예금 토큰으로 구현된다. 겉으로 보면 기관용 CBDC와 예금 토큰 모두 “디지털 화폐”처럼 보이지만, 실제 역할은 서로 다르다. 중앙은행 화폐와 상업은행 예금을 모두 토큰화하되, 두 토큰의 발행 주체와 사용 범위, 결제 기능을 명확히 분리한다.

먼저 기관용 CBDC는 한국은행이 발행하는 디지털 형태의 중앙은행 화폐다. 일반 이용자가 직접 사용하는 범용 CBDC가 아니라, 은행 등 금융기관이 은행 간 결제에 사용하는 기관용 디지털화폐다. 현행 지급준비금이 은행 간 최종 결제자산으로 기능하듯, 기관용 CBDC는 디지털화폐 시스템 안에서 은행 간 자금 이전과 최종 결제를 담당한다. 따라서 기관용 CBDC는 이용자가 직접 사용하는 결제수단이 아니라, 예금 토큰의 가치를 최종적으로 뒷받침하는 은행 간 결제 인프라다.
한편, 예금 토큰은 시중은행이 발행하는 토큰화된 예금이다. 일반 이용자는 자신의 은행 예금을 예금 토큰으로 전환한 뒤, 전자지갑을 통해 온·오프라인 가맹점에서 결제에 사용할 수 있다. 한국은행은 예금 토큰을 예금과 유사한 성격을 가지면서도 토큰화 기술을 활용해 디지털화폐 형태로 구현한 것으로 설명한다. 즉 예금 토큰은 기존 은행 예금을 대체하는 별도 가상자산이라기보다, 은행 예금을 토큰 기반 결제 환경에 맞게 확장한 형태다.
예금 토큰의 타행 이체 방식인 소각 후 재발행(burn-and-issue)은 이 원리를 기술적으로 구현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A은행 고객이 B은행 가맹점에서 3만 원어치를 결제한다고 하자. 이때 A은행의 스마트 계약은 이용자의 전자지갑에서 예금 토큰 3만 원을 소각하고, 동시에 한국은행 디지털화폐 시스템에서는 A은행의 기관용 디지털화폐가 B은행으로 이전된다. 이후 B은행의 스마트 계약은 가맹점 전자지갑에 예금 토큰 3만 원을 새로 발행한다.
이때 세 단계는 각각 분리된 절차가 아니라 하나의 조건부 처리 흐름으로 묶인다. A은행 예금 토큰 소각, 기관용 디지털화폐를 통한 은행 간 정산, B은행 예금 토큰 재발행이 함께 성공해야 거래가 완료된다. 결과적으로 A은행 고객이 사용한 예금 토큰과 B은행 가맹점이 받은 예금 토큰은 항상 같은 원화 가치로 연결된다.
반면 같은 은행 내 이체는 더 단순하다. 이용자 전자지갑과 사용처 전자지갑을 개설한 참가은행이 같다면, 예금 토큰을 소각하고 재발행할 필요가 없다. 같은 은행 안에서 이용자 전자지갑의 예금 토큰이 가맹점 전자지갑으로 그대로 이전된다.
3-3. 예금 토큰은 스테이블코인과 무엇이 다른가
예금 토큰은 겉으로 보면 원화 가격을 따르는 디지털 토큰처럼 보이기 때문에 스테이블코인과 비슷해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두 구조는 출발점이 다르다. 스테이블코인은 민간 발행사가 준비자산을 보유하고 그에 대응하는 토큰을 발행하는 구조다. 반면 예금 토큰은 은행 예금을 토큰 기반 결제 환경에 맞게 표현한 구조다.
스테이블코인은 Tether, Circle 등 민간 발행사가 퍼블릭 블록체인에 발행하며, 발행사가 보유한 달러 예금, 단기국채, 현금성 자산 등이 준비자산 역할을 한다. 사용자는 발행사의 준비자산 관리 능력과 상환 가능성을 신뢰해야 한다. 반면 예금 토큰은 은행이 한국은행 CBDC 네트워크에서 취급하는 예금 및 이에 준하는 전자적 증표로 설계되며, 한국의 가상자산이용자보호법 체계에서도 가상자산 범위에서 제외되는 대상으로 정리되었다.
즉 프로젝트 한강은 민간 스테이블코인을 중앙은행 화폐로 대체하려는 구조가 아니다. 기관용 CBDC를 최종 결제 앵커로 두고, 예금 토큰을 이용자 결제수단으로 배치함으로써 기존 2계층 통화 시스템을 토큰화된 결제 환경으로 확장하는 실험에 가깝다.
4. 프로젝트 한강은 어디까지 연결될 수 있는가
4-1. 이머니 토큰과 특수지급 토큰
프로젝트 한강에서 눈여겨봐야 할 점은 예금 토큰만 제시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보고서와 한국은행의 공식 설명에는 예금 토큰 외에도 이머니 토큰과 특수지급 토큰이라는 구조가 함께 등장한다. 이 둘은 프로젝트 한강이 향후 민간 디지털통화와 외부 디지털자산 거래를 어떻게 연결하려 했는지 보여주는 중요한 단서다.
예금 토큰이 일상 결제를 담당한다면, 이머니 토큰과 특수지급 토큰은 외부 자산 거래의 대금 지급을 연결하는 역할을 맡는다. 예를 들어 탄소배출권, 디지털 상품권, RWA 같은 자산이 별도 원장에서 거래될 때, 그 자산 이전과 대금 지급을 안전하게 연결하기 위해 필요한 결제용 토큰이다.

먼저 이머니 토큰은 디지털화폐를 준비자산으로 하여 발행되는 민간 디지털통화다. 예금 토큰이 은행 예금 자체를 토큰화한 것이라면, 이머니 토큰은 발행액에 상응하는 기관용 CBDC를 준비자산으로 보유하고 그 위에서 별도의 민간 결제토큰을 발행하는 구조인 것이다.
한편 특수지급 토큰은 이머니 토큰을 외부 원장 결제에 연결하기 위한 장치다. 통합원장의 목표는 토큰화된 자산과 토큰화된 화폐가 서로 다른 시스템에 있더라도, 자산 이전과 대금 지급이 하나의 연속적인 거래처럼 처리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런데 탄소배출권이나 디지털자산 거래 플랫폼 같은 외부 원장에 기관용 CBDC를 직접 발행·유통시키는 것은 적절하지 않을 수 있다. 기관용 CBDC는 기본적으로 은행 간 최종 결제자산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로젝트 한강의 설계는 한 단계를 더 둔다. 먼저 디지털화폐 시스템 안에서 기관용 CBDC를 담보로 이머니 토큰을 발행하고, 외부 연계 시스템에서는 이 이머니 토큰을 담보로 특수지급 토큰을 발행한다. 이론적으로는 CBDC를 담보로 특수지급 토큰을 바로 발행하는 방식도 가능하지만, 이 경우 한국은행 당좌계좌를 보유할 수 없는 비은행 기관은 발행 구조에서 배제될 수 있다. 반면 이머니 토큰을 중간에 두면, 중앙은행 화폐를 직접 외부 원장에 올리지 않으면서도 민간 디지털통화를 통해 외부 자산 거래의 결제 레그를 만들 수 있다.
이 차이는 통화 시스템 안에서 맡는 역할의 차이로 이어진다. 예금 토큰은 기존 은행 예금을 토큰화한 것으로 이용자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원화 결제수단에 가깝다. 은행 앱이나 전자지갑을 통해 가맹점 결제, 개인 간 지급, 온라인 결제에 활용될 수 있다. 반면 이머니 토큰/특수지급 토큰은 기관용 CBDC를 준비자산으로 발행되기 때문에, 일반 생활 결제보다는 결제 안정성, 자산 이전과 대금 지급의 원자적 연결이 중요한 환경에 더 적합하다.
즉 외부 원장에서 직접 쓰이는 것은 CBDC가 아니라 특수지급 토큰이지만, 그 가치는 이머니 토큰을 거쳐 최종적으로 기관용 CBDC에 연결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특수지급 토큰이 예금 토큰 기반 결제수단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금 토큰을 담보로 외부 원장용 토큰을 만들 수도 있겠지만, 이 경우 해당 토큰은 특정 은행 예금 또는 은행권 예금에 대한 청구권 성격을 띠게 된다.

정리하면 기관용 CBDC는 중앙은행 화폐를 토큰화해 은행 간 최종 결제의 앵커 역할을 맡고, 예금 토큰은 은행 예금을 토큰화해 일반 이용자의 결제수단으로 기능한다. 이머니 토큰과 특수지급 토큰은 여기에 외부 자산 거래의 대금 지급을 연결하는 현금 결제 레그 역할을 더한다.
4-2. 원장에 올라가는 것과 남겨지는 것
지금까지 프로젝트 한강이 중앙은행 화폐, 은행 예금, 민간 결제토큰, 외부 원장 결제수단을 어떻게 토큰화해 역할을 나누는지 살펴보았다. 이제 마지막으로 봐야 할 것은 이 토큰화된 기능들이 실제 시스템 안에서 어디에 배치되는가다.
프로젝트 한강은 모든 금융정보와 결제 인프라를 하나의 블록체인으로 옮기는 구조가 아니다. 결제에 필요한 핵심 상태 변화와 스마트 계약 실행은 온체인에서 처리하되, 개인정보, 본인확인, 계정 관리, 모바일 앱, 사용처 관리, 기존 결제기기 연계는 기존 금융 시스템과 외부 시스템에 남겨두는 하이브리드 구조다. 이 경계를 이해해야 프로젝트 한강이 기존 금융 인프라를 전면 대체하려는 시도가 아니라, 온체인 결제 레이어와 오프체인 금융 인프라를 결합하려는 시도라는 점이 분명해진다.

프로젝트 한강에서 온체인으로 구축된 부분은 분산원장 계층이다. 이 계층은 다시 원장 계층과 스마트 계약 계층으로 나뉜다. 원장 계층은 한국은행과 참가은행이 함께 운영하는 허가형 분산원장 네트워크로, 기관용 CBDC와 예금 토큰의 거래 내역을 기록하고 검증한다. 스마트 계약 계층은 기관용 CBDC, 예금 토큰, 디지털 바우처의 발행·이체·소각·조건부 실행을 처리한다. 즉 온체인은 디지털화폐 시스템의 모든 기능을 담는 공간이 아니라, 결제 성립에 필요한 핵심 상태 변화와 실행 로직을 처리하는 영역이다.
반대로 개인정보와 부가 결제 정보는 원장에 직접 올리지 않는다. 분산원장에는 이용자 지갑주소, 사용처 지갑주소, 금액, 거래 시간처럼 결제에 필요한 최소 데이터만 기록되고, 자금세탁방지 관련 정보, 개인식별정보, 사업자번호, QR 코드 정보, 결제 완료 정보 등은 오프체인 메시지 채널을 통해 교환된다. 이 구조는 분산원장이 결제의 무결성과 조건부 실행을 담당하되, 민감 정보와 부가 데이터는 기존 금융기관과 외부 시스템의 책임 아래 관리되도록 만든다.
대부분의 기존 금융 인프라도 원장으로 대체되지 않는다. 한국은행의 한은금융망, 참가은행의 계정계 시스템과 모바일 뱅킹 앱, 사용처의 POS·키오스크, 본인확인시스템 등은 그대로 남아 디지털화폐 시스템과 필요한 범위에서 연동된다. 이용자는 기존 은행 앱에서 전자지갑을 개설하고, 예금을 예금 토큰으로 전환하며, QR 코드를 통해 결제한다. 다만 그 뒤에서는 예금 토큰 소각, 기관용 CBDC 이전, 예금 토큰 재발행 같은 핵심 상태 변화가 분산원장과 스마트 계약을 통해 처리된다.
4-3. 실제 시장은 온체인 바깥의 연결 지점에서 만들어진다
중요한 것은 바로 이 경계다. 프로젝트 한강을 통해 기관용 CBDC, 예금 토큰, 이머니 토큰, 특수지급 토큰이 분산원장 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발행·이전·정산될 수 있는지에 대한 기본 윤곽은 어느 정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실제 시장을 만들 영역은 오히려 아직 정해지지 않은 온체인 바깥에 있다.
이용자는 예금 토큰의 기술 구조를 직접 이해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기존 은행 앱이나 지갑에서 얼마나 쉽게 접근할 수 있는지, 어떤 사용처에서 쓸 수 있는지, 퍼블릭 체인이나 RWA 플랫폼과 얼마나 안전하게 연결되는지다.
따라서 이제 다음 쟁점은 온체인 통화 레이어 자체보다, 그 바깥의 오프체인 시스템을 어떻게 열고 온체인 애플리케이션 레이어와 연결할 것인가다. 이 부분이 명확해져야 예금 토큰과 CBDC 실험은 단순한 지급결제 테스트를 넘어, 원화 기반 디지털 금융 인프라로 확장될 수 있다.
5. 결론
원화 디지털 통화 인프라의 확장 가능성을 말하기 전에 먼저 짚어야 할 문제가 있다. 프로젝트 한강이 중앙은행 화폐와 스마트 계약, 허가형 원장이 결합되는 구조인 만큼 CBDC를 둘러싼 일반적인 우려에서도 자유롭지 않다.
5-1. CBDC에 대한 일반적인 우려
CBDC를 둘러싼 가장 큰 우려는 감시와 통제다. 중앙은행이나 정부가 개인의 지갑과 거래 내역을 직접 들여다보고, 특정 자금을 동결하거나, 특정 용도에만 쓸 수 있는 돈을 강제로 발행할 수 있다는 불신이 대표적이다. 중앙은행 화폐와 스마트 계약, 허가형 원장이 결합되는 구조라면 이러한 우려는 자연스럽게 따라올 수밖에 없다.
다만 프로젝트 한강의 설계는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범용 CBDC와는 다르다. 한국은행 디지털화폐는 일반 이용자가 직접 보유하고 사용하는 돈이 아니라, 참가은행이 보유하고 은행 간 결제에 사용하는 기관용 디지털화폐다. 일반 이용자는 한국은행이 발행한 CBDC를 직접 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은행 예금을 전환한 예금 토큰을 사용한다. 즉 프로젝트 한강은 중앙은행이 국민에게 직접 지갑을 열어주는 구조가 아니라, 기존 은행 예금과 중앙은행 결제 시스템을 토큰화 환경에 맞게 재구성하는 방식이다.
개인정보 설계도 모든 거래정보를 중앙은행에 집중시키는 방식과는 거리가 있다. 한국은행은 프로젝트 한강에서 정부와 한국은행이 개인별 예금 토큰 현황을 직접 파악하거나 통제할 수 없고, 참가자 개인정보는 전자지갑을 발급한 은행이 관련 법령에 따라 관리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분산원장은 거래의 무결성과 조건부 실행을 담당하되, 개인식별정보와 고객 관리는 기존 금융기관의 책임 아래 두는 구조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이 CBDC에 대한 우려를 모두 없애는 것은 아니다. 스마트 계약은 설계에 따라 바우처 집행, 자동 결제, 토큰화 자산 결제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지만, 반대로 과도한 사용 제한이나 행정적 통제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 앞으로 CBDC와 예금 토큰이 어떤 범위에서 활용되고, 개인정보 보호와 프로그래밍 권한이 어떤 법적 절차와 거버넌스 아래 설계되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5-2. 은행 중심 스테이블코인의 원형은 이미 제시되었다
이 맥락에서 스테이블코인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예금 토큰과 스테이블코인은 반드시 경쟁 관계일 필요가 없다. 예금 토큰이 허가형 통화 원장 안에서 은행 예금의 디지털 표현으로 기능한다면, 스테이블코인 또는 스테이블코인형 결제토큰은 그 신뢰를 외부 애플리케이션과 퍼블릭 체인 환경으로 확장하는 표현 자산이 될 수 있다. 향후 제도적 기준이 정리된다면, 원화 예금과 예금 토큰을 기반으로 외부 원장에서 결제, 송금, RWA 거래에 활용되는 원화 결제토큰이 발행되는 구조도 가능하다.
실제로 프로젝트 한강의 개념검증 실험에서도 외부 분산원장과의 연계를 위해 자산 간 안전 이전 프로토콜(SATP)이 활용됐고, 특정 디지털자산 거래의 대금 지급을 위한 특수지급 토큰 구조가 제시되었다. 다만 이는 상용화된 퍼블릭 체인 브릿지 모델이 아니라, 서로 다른 분산원장 간 안전한 자산 이전과 상호운용성을 검증한 PoC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이 점에서 Canton Network의 흐름은 참고할 만하다. Canton은 기관 금융을 위해 설계된 네트워크지만, Chainlink의 CCIP와 LayerZero의 크로스체인 메시징을 도입하며 퍼블릭 체인과의 연결을 확대하고 있다. 이는 기관용 네트워크가 폐쇄적인 전용망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프라이버시와 규제 준수는 유지하되 퍼블릭 체인의 유동성·자산·애플리케이션과 연결되는 방향으로 진화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프로젝트 한강 역시 장기적으로는 한은금융망과 은행권 시스템 안에서만 작동하는 구조가 아니라, RWA 플랫폼과 퍼블릭 블록체인으로 이어지는 온·오프램프 구조를 고민해야 한다.
따라서 기업의 기회는 단순히 “누가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발행할 것인가”에만 있지 않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은행 중심 발행 구조가 만들어질 경우, 비은행 기업이 어떤 역할을 맡을 수 있는가다. 원화 스테이블코인의 발행 권한은 은행권에 먼저 열릴 수 있지만, 실제 시장을 키우는 접점과 서비스는 온체인 바깥의 민간 기업들이 만들어갈 가능성이 크다.
5-3. 한국 시장의 기회와 경고
기회는 이미 시작되었다. 한국은 프로젝트 한강을 통해 기관용 CBDC, 예금 토큰을 실거래 환경에서 검증하고 이머니 토큰, 외부 원장 연계를 개념검증해 본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규제 당국과 주요 은행이 직접 참여했다는 점도 중요하다. 이는 한국이 단순히 해외 사례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원화 기반 디지털 통화 인프라의 초기 기준을 직접 만들어갈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뜻이다.
다만 기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큰 리스크는 갈라파고스화다. 허가형 분산원장 안에서만 작동하는 예금 토큰이 글로벌 퍼블릭 체인, 해외 스테이블코인, RWA 시장과 충분히 연결되지 못한다면 한국의 디지털 통화 실험은 국내 결제 효율화에 머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허가형이냐 퍼블릭이냐의 선택이 아니라, 두 영역을 연결할 때 토큰의 법적 성격, KYC 연속성, 상환 구조, 책임 소재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지다.
한국은행이 BIS Project Agorá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 리스크를 완화하는 중요한 요소다. Agorá는 여러 국가의 중앙은행과 민간 금융기관이 토큰화된 상업은행 예금과 기관용 CBDC의 국가 간 연동 가능성을 실험하는 프로젝트다. 한국이 이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것은 프로젝트 한강이 국내 파일럿에 그치지 않고, 글로벌 토큰화 금융 인프라와 연결될 가능성을 함께 모색하고 있다는 의미다.
그러나 국제 논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골든타임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국내에서는 가상자산 과세 시행이 예정되어 있는 반면, 스테이블코인과 토큰화 자산을 어떤 법적 지위와 책임 구조 아래 다룰지에 대한 종합 규율은 아직 충분히 정리되지 않았다. 지금 필요한 것은 세금을 먼저 걷는 논의가 아니라, 원화 디지털통화가 은행 예금, 예금 토큰, 이머니 토큰, 민간 스테이블코인, RWA, 퍼블릭 블록체인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온·오프램프의 법적 기준을 명확히 하는 일이다. 한국이 인프라 실험에서는 앞서가고도 실제 시장 형성의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면, 발행 주체보다 더 중요한 연결 지점, 즉 누가 어떤 조건에서 원화 유동성을 온체인으로 올리고 다시 오프체인 금융 시스템으로 되돌릴 수 있는지를 제때 정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