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딱 여기까지
필자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게임 토크노믹스의 전형은 지금까지 소개한 바와 같다. 단일 토큰을 활용하여 투자자와 플레이어가 모두 상호작용하는 구조이면서, 토큰의 수요와 공급이 균형을 이룰 수 있는 구조라고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토크노믹스가 수행할 수 있는 역할은 딱 여기까지라고 생각한다. 게임 프로젝트의 성공은, 그 핵심 동력은 ‘어떻게 많은 게이머들을 끌어들일 것인지’이며, 이 목표를 위해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져야 할 사항은 게임의 재미나 퀄리티, 그리고 밸런싱 및 마케팅 등의 운영전략이지 게임 토크노믹스 그 자체는 아닐 것이다.
4. 인게임 토큰을 도입하는 방법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게임 토큰 도입, 더 정확히는 인게임 통화를 성공적으로 토큰화할 수 있는 방법이나 시나리오는 없을까? 필자가 생각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인게임 경제를 외부 환경에 개방하는 데에 있어서 고려해야 할 점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로 인게임 경제 자체의 통화 인플레이션율이 지속가능한 수준으로 유지되어야 한다. 인게임 통화의 발생과 소각(일명 ‘faucet and sink’) 비율을 비슷한 수준으로 유지할 수 있도록 구조를 설계해야 하며, 인게임 통화의 인플레이션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미치지 않도록 운영 측면에서도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두 번째로 인게임 경제를 개방하기 전에 외부 자본의 진퇴에 따라 경제 전체가 흔들리지 않을 만큼의 규모 형성이 필요하다. 이때 ‘규모’라 함은 인게임 통화의 시가총액 등의 양적 규모를 뜻하기도 하지만, 인게임 통화의 쓰임새의 다양성이 충족되어야 함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는 Tascha가 UST 폭락 사태 이후 스테이블코인 비즈니스에 대해 설명한 조언 중 하나인 “상관관계가 적은 수요의 필요”와 맥락을 공유한다.
- UST를 뒷받침하는 것 외에는 LUNA의 사용 사례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디페깅 압력이 충분히 높은 경우 가격을 지지할 다른 수요가 없기 때문에 LUNA 가격은 0으로 밀려나게 된다. 이와 대조적으로 대부분의 법정화폐는 상업 및 무역과 관련된 비투기적 수요가 존재하고, 따라서 투기 세력에 의한 공매도가 심하더라도 통화 정책의 중대한 실수가 없는 한 가격이 0이 되지는 않는다. — 출처: ‘5 Lessons From Terra/Luna Fallout, for Future Stablecoin Designers, Investors, and Regulators’, Tascha
4-1. 발생과 소각 메커니즘 — 이브 온라인(Eve Online)의 예시
이브 온라인은 우주를 배경으로 하는 MMORPG 게임으로 2003년에 서비스를 시작한 장수 게임이다. 약 8,000여 개의 각기 다른 항성이 존재하며, 각 항성이 각기 다른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이브 온라인은 탄탄한 인게임 경제를 구축한 것으로 유명한데, 일반적으로 많은 MMORPG 게임들이 과도한 인플레이션 문제를 겪고 있는 것을 고려하면 인게임 토큰 도입을 고민하는 입장에서 모범 사례로 평가할 만한 대상이다.
4-2. 이브 온라인 경제의 특징
이브 온라인의 경제는 인게임 화폐인 ISK를 중심으로 순환하는데, 실제 경제와 같이 통화량, 통화 속도, 물가 수준, 생산량 등을 게임사 측이 트래킹 및 분석하여 월별 리포트로 제공하고 있다. 현재 2003년 서비스 이후 ISK 총공급량은 약 8배 증가했으며, 실제 경제에서 달러 M2 통화량이 2000년대 초반에 비해 약 4배 증가한 것을 고려하면, 굉장히 건전한 수준의 가상 경제가 유지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2017–2023년 이브 온라인 ISK 통화 공급량 추이.
출처: 이브 온라인 월별 경제 리포트
달러 M2 공급량은 2000년대 초반에 비해 약 4배 상승; 출처: FRED
지속 가능성이 높은 이브 온라인의 경제 시스템은 크게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가진다.
- 보통 MMORPG의 경우 캐릭터 성장에 따라 안정적으로 더 많은 인게임 통화를 수급할 수 있는 환경을 특징으로 한다. 하지만 이브 온라인상에서는 그러한 환경이 제공되지 않으며, 거의 모든 곳에서 PVP(유저 간 전투)가 가능하고, 캐릭터 사망 시 아이템이 소각되는 메커니즘을 통해 자산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구조를 유도하고 있다.
- 월 정액제를 채택하고 있는데, ‘PLEX’라는 구독권의 개념을 가진 아이템을 주기적으로 결제하여 게임 플레이를 이어나가야 한다. 이러한 시스템은 봇을 이용한 무분별한 ISK 생산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진다.
- PLEX는 인게임 아이템으로 취급되기 때문에 게임 플레이를 통해 ISK를 획득하여 구매하는 방법도 존재한다. 무료로 이브 온라인을 플레이하려는 플레이어들은 ISK를 생산하여 타 플레이어들이 판매하는 PLEX를 구매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거래 수수료 명목으로 ISK가 소각되는 효과가 발생한다.
- 거의 모든 아이템이 플레이어에 의해 생산되고 거래되며, 게임사는 NPC 보상을 통해 통화량을 조절하는데에 집중한다.
더 자세한 내용은 디스이즈게임에 게재된 한 게이머의 글을 참고해 주길 바란다.
4-3. 인게임 통화를 토큰화한다는 것은
이브 온라인을 운영하는 CCP 게임즈는 이브 온라인 생태계 내에서 발생하는 ISK 총 공급량 추이, 모든 생산물의 가치, ISK의 통화 속도, CPI(Consumer Price Index) 및 PPI(Producer Price Index) 등의 물가 수준을 수치화하여 월별 리포트로 공시하고 있다.
2023년 2월 이브 온라인 생산, 파괴, 채굴 가치 추이
출처: 이브 온라인 월별 경제 리포트
2023년 2월 ISK 통화 속도; 출처: 이브 온라인 월별 경제 리포트
2023년 2월 이브 온라인 CPI 분석;
출처: 이브 온라인 월별 경제 리포트
위와 같이 인게임 생태계의 통화, 생산물, 물가 수준을 모두 수치화하여 분석하고 운영 기반으로 활용하는 일은 지속가능한 경제 시스템 구축에 있어서 중요한 일이다.
경제의 구성 요소를 아주 단순하게 살펴보면 위 화폐 수량설과 같이 통화량(M), 통화 속도(V), 물가 수준(P), 총 생산물 가치(Y)의 총 4개의 요소로 분해해 볼 수 있는데, 인게임 경제 요소 분석을 통해서 전체적인 시스템을 조망하고 게임사 측은 통화량 조절(M 변수 조정)을 통해 인게임 경제를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구축해 나갈 수 있다. 결국 인게임 통화를 도입하고 운영한다는 것의 의미는 게임사가 인게임 경제를 책임지는 작은 중앙은행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귀결한다.
4-4. 개방 경제로의 이행
한 단계 더 나아가서, 인게임 통화를 성공적으로 토큰화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선례가 존재하지 않아 방법론을 주장하는 것이 조심스럽지만, 필자가 생각하는 가장 가능성이 높은 방법은 다음과 같다. 물론 앞서 설명한, 인게임 경제의 규모나 인게임 통화에 대한 다양한 수요 형성이 이미 선결되었다고 가정하겠다(다양한 수요란 인게임 통화가 개방 경제에서 다루어지더라도 투기적 수요 외에 (주로 인게임 상에서) 거래 및 소비 등 다른 목적의 수요를 보유해야 함을 의미한다).
- 인게임 경제를 폐쇄 경제로 출범
- 우선 인게임 경제가 출범할 당시에는 폐쇄 경제로 출범할 필요성이 있다. 충분한 경제 규모가 달성되지 않은 상태의 인게임 경제는 개방 경제 환경에서 대규모 자본 움직임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거나 인게임 화폐의 쓰임이 투기적 수요에 치중될 위험이 높다.
- 따라서 게임 출시 당시에는 자본의 유입만을 허용하는 폐쇄 경제로 출범하되, 인게임 경제 규모에 따라 인게임 통화를 토큰화할 수 있다는 단서 조항(마치 유니스왑(Uniswap)의 ‘fee switch’ 개념)을 명시해 두는 것으로 충분하다. - 토큰화 이후 관세의 적용
- 인게임 통화가 토큰화되었다면, 통화의 유출에 대한 관세가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개방 경제 도입 이후에도 인게임 경제는 전체 시장에 비해 여전히 작은 수준일 것이므로 통화 유출에 대한 높은 관세를 적용하고, 경제 규모 성장에 따라 거버넌스를 통해 관세를 점진적으로 낮춰가는 과정이 필요할 것이다.
4-5. 게임사는 왜?
이처럼 인게임 토큰을 도입한다는 것의 의미는 진정한 의미의 ‘메타버스’, 즉 가상의 국가를 형성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취급될 수 있다. 그렇다면 게임사들이 이러한 과정을 수행할 동기는 존재할까? 가장 명시적인 동기는 가상 경제의 규모가 현실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인게임 토큰을 도입하고 안정적인 메타버스를 구축하게 되면, 인게임 경제를 현실 시장과 연결시킴으로써 게임 경제 가치를 시가 총액 등으로 수치화하여 표현하고 그 가치를 게임사에 투영시킬 수 있다. 또한 게임의 금융화, 즉 인게임 통화 및 자산을 이용한 금융 상품을 개발하고 운용할 가능성도 있을 수 있으나, 너무 막연한 사례이므로 단순히 언급하는 정도로만 줄이겠다.
5. 마치며
지금까지의 논의는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 게임 토크노믹스는 인게임 경제에서 도입하는 경우 당위성을 거의 찾을 수 없고, 게임 외부에서 투자자와 플레이어 간의 상호작용에 있어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 인게임 토큰을 적용하려는 경우, 실제 현실 경제와 매우 유사한 가상 경제 시스템을 구축하고 경제 규모 성장에 따라 점진적으로 개방 경제로 이행하는 시나리오가 필요할 것이다.
- 게임 토크노믹스의 의의는 플레이 경험이나 재미의 증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게임 프로젝트에 대한 투자자와 플레이어의 긍정적 행동 유발에 있다.
게임에 블록체인을 도입하는 의의를 인게임 경제에 대한 토크노믹스 설계를 통해서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속가능성은 프로젝트 참여자들이 기꺼이 위험을 감수하고 돈과 시간 등 자신이 가진 자원을 투입하려는 의도를 보일 때 달성될 수 있으나, 인게임 경제에서 이것이 가능한 경우는 겜블(Gamble) 장르의 게임 외에 거의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웹3 게임의 영역에서의 토크노믹스는 이 글에서 논의한 수준 이상으로 크게 발전시킬 가능성이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진부하지만 원론적인 얘기로 돌아가 블록체인이라는 툴이 게임과 게이머의 경험에 기여할 수 있는 본질적인 부분에서 논의를 이어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Immutable Game Studio의 VP를 역임하고 있는 Derek Lau의 글에 나타난 블록체인이 게임에서 사용될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언급하면서 글을 마무리하겠다.
5-1. 블록체인이 실제로 게임에서 사용될 수 있는 방안들 — Derek Lau 글에서 발췌
- 플레이어에게 소유권 및 거래 가능성 제공
- 아이템 제작, 거래 등의 행위를 합법적으로 수행 가능 - 희소성이 있는 디지털 상품 만들기
- 게임 아이템 희소성을 투명하게 증명 가능 - 소유권에 대한 기록으로 사용하기
- 게임 아이템에 대한 거래 기록 확인이 용이 - 게임에서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을 해금
- 아이템 거래 수수료 징수, 토큰 및 랜드 세일 등 비즈니스 모델 다양화 - 게임 생태계의 모든 참여자 간의 인센티브를 조정
- 게임 생태계의 모든 참여자가 게임의 발전으로 인한 이익을 공유 가능 - 게임 개발자에 대한 기금 모금 방식을 다양화
- 일반적으로 게임 개발을 지속하기 위해 기금을 모금했던 방식에서, 게임 내 자산 판매를 통해 초기에 자금 조달이 가능해 - 제3자가 게임을 기반으로 새로운 비즈니스를 구축할 수 있도록 허용
- 게임 플랫폼 위에서 프로젝트 주도가 아닌 제3자가 새로운 비즈니스를 구축하는 것이 가능
<참고 자료>
- Echelon prime docs
- coldplunge, Twitter thread
- Eve online, Monthly Economic Report — February 2023
- DeftCrow, 이브 온라인의 경제가 특별한 이유는 무엇인가?
- Derek Lau, Blockchain game design: analysis of opportunities and design challenges